[2007년 2월에 반기련의 역사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저는 기독교 문제 이외에도 역사, 동물학, 천문학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데, 특히 한국사와 동양사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릴 때는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역사를 연구의 대상이 아닌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살아가면서 역사란 그저 읽고 즐기는 이야기 거리가 아니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는 연구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올린 2007년 이후에 저의 생각이 변한 부분도 있고, 또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일단 2007년에 이 글을 그대로 올리지만, 시간이 있을 때면 이 글에 대한 추가, 부연, 더 나가서 수정하고 싶은 내용들을 담은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면”이라는 제약이 스스로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앞으로 추가로 올리는 글들을 위한 기본 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이 글을 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알지만 저도 어렸을 때 외세를 불러 들여 같은 민족의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민족의 활동 무대를 좁힌 김 유신과 김 춘추가 죽도록 미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좀 다른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뀐 이유에 상당한 패러독스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우선, 삼국통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김 유신과 김 춘추의 아이디어가 아니며 후세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이며 날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이 허구이며 날조라는 생각이 들면서, 김 유신과 김 춘추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역사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또 지금의 우리가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던,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나당 공조 참여 결정이 바로 현재 우리 민족의 정체성 형성의 초석이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하는데, 이 글은 저 스스로 어떤 확신을 가지고 펴는 주장이 아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통일이라는 그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틀에 박힌 기존의 역사관과는 다른 가능성들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제가 평소에 쓰는 글들과는 달리 자문자답식의 독백 형식으로 썼음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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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7세기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는가?  이 것은 정말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백제와 고구려 왕실은 모두 고 주몽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반면, 신라와 가야는 그렇지 않았다.  또, 신라의 영토가 고조선이 존재할 때 고조선의 영향하에 있었는지?  즉, 북방에서 세워진 고구려는 당연히 고조선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이며, 백제는 남방의 나라이지만 북방에서 내려온 세력이 세운 나라이므로 이 또한 고조선의 명맥을 이어받은 나라라 할 수 있지만, 7세기의 신라인들에게는 과연 자신들이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이 있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관점은 어떠했을까도 흥미로운 일이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북방계가 주축이 되어 말갈족, 그리고 아마도 거란족이 같이 존재한 다민족 국가인데, 그 근원이 불분명한 거란족은 어떤지 몰라도, 말갈족은 자신들을 고조선의 후예로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황하에서, 고구려내의 북방계 우리 민족은 같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말갈족과 거란족은 다른 민족으로 보면서, 남방의 신라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여겼을까?  특히 신라인들에게 자신들이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백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일본(그 당시의 국명은 야마토 왜)과 신라 중 어느 나라를 동족의 국가로 생각했을까?  주목할 사실은 백제는 역사를 통해 신라, 고구려와는 무수한 전쟁을 하지만, 왜국과 전쟁을 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왜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신라와는 무수한 전쟁을 하지만, 백제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백제와 왜국의 그러한 관계는 단순한 전략적 동맹인가, 아니면, 그 두 국가 사이에서는 어떤 연방제 같은 관계가 있었는가?  만약 백제가 왜국을 동족의 국가로 생각하지 않고 고구려와 신라를 동족의 국가로 생각하면서도, 왜국과 전략적 동맹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했고 그런 전략적 동맹이 수백년 유지되었다면,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나, 왜국을 동원해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한 백제나 무엇이 다른가?  만약 김 유신과 김 춘추가 외세를 동원해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킨 이유로 역사의 죄인이 되어야 한다면, 백제는 그들의 역사 자체가 우리 민족사에 대한 배반 그 자체인가?  (이 것은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가 신라와 전쟁을 할 때, 말갈족이나 거란족 군사들을 동원시킨 사례가 많을텐데,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동족의 국가라고 생각했다면, 고구려의 지도부는 이민족을 동원해 동족을 공격하는 일을 다반사로 자행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관은 현대의 민족관으로 삼국시대를 보려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는 아닐까?  우선, 많은 일본 사람들이 천황이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 출신임을 인정하는 점과 또 백제가 망한 후, 왜국이 수많은 수군을 보내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이 왜국의 수군이 백강 전투에서 당나라 수군에게 대패함으로써,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좌절되었다는 점들을 고려해 보면, 백제와 왜국은 단순한 전략적 동맹 관계가 아닌, 운명 공동체 인식에 근거한 혈맹이었을 것이며, 두 나라는 연방 체제와 비슷한 체제로 운영되던 사실상의 한 나라라는 가설을 심각하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볼 때, 백제인들이 신라인은 동족이고 일본인은 이민족이라고 여겼을 것이라는 이론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목적은 처음부터 민족 통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목적은,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의 야욕을 이용하여, 그 기회에 당나라를 돕는 조건으로, 백제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왜국 정벌까지는 도저히 꿈꿀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고구려와 백제를 동족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므로,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쓰러뜨린다는데 대한 죄의식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김 유신과 김 춘추, 특히 김 유신이 정말 지혜로운 인물로 돋보이는 이유는, 당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들 것을 미리 내다 보았고, 그래서 미리 준비를 해 두어, 그런 당나라의 계교를 물리친 것뿐만 아니라 그러는 과정에서 나당 약조에 의해 모두 당나라 땅이 되었어야 할 고구려 땅의 일부까지도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삼한 일통”이라는 개념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머리 속에는 전혀 없었던 개념이고, 그 이후 통일 신라 시대에 고구려계와 백제계 유민들을 유화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인데 그러는 과정에서 그것이 마치 김 유신, 김 춘추의 전쟁 목적이었던 것처럼 후세의 통일 신라나, 또는 김 부식과 같은 고려 시대의 신라계 학자들이 역사 왜곡을 한 것은 아닐까?

사실, 7세기의 나당 연합군의 동방 정복전쟁을 도저히 삼국통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망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왕실일 뿐, 그것이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이유이다.

우선 고구려의 경우, 나라가 망한지 30여년 만에 발해가 세워진 것은,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완전 성공하였다는 이야기이며, 다만 고씨 왕조가 대씨 왕조로 바뀌었다는 이야기 일뿐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고 고구려의 백성을 대부분 흡수한 발해가 북쪽에 떡 버티고 있는데, 겨우 대동강까지 북상한 신라가 삼국통일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인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심지어 발해의 멸망이후에도 고구려의 전통이 끊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의 요나라는 스스로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수차례 강조했으며, 그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우리 민족과 함께 고구려와 발해를 이룬 주축 세력인 말갈족의 후예들이다.  [이에 대해서 따로 쓴 글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10.antichrist.or.kr/bbs/board.php?bo_table=gy&wr_id=1618&sca=&sfl=mb_id%2C1&stx=WarmIce&sop=and ] 특히,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는 과정에 대해서 우리민족은 왕씨의 고려 제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의 사관만을 일방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요나라의 건국과 발해 멸망 과정은 상당히 다른 측면에서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발해가 외세인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그 것이 옳은 사관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거란족의 요나라 건국 과정은 신라가 후삼국으로 나누어지는 과정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즉, 신라 왕실이 힘이 없어지자, 궁예, 견훤 등이 나라를 세우고, 신라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며 나라 이름도 옛 백제와 고구려의 나라 이름을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결국 신라는 왕 건의 고려에 의해 망하는 것처럼, 요나라의 건국과 발해의 멸망도 비슷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발해의 대씨 왕조가 쇠약해지자, 발해의 일부를 형성하던 거란족은 더 이상 대씨 왕조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거기에 야율 아보기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자, 거란족은 야율씨 부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더 나가서 발해의 대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고구려의 명맥을 이어 가겠다는 웅지를 키우고 결국은 그것을 실현시킨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즉, 발해가 요에게 망한 것은 한반도에서 김씨의 신라 왕조가 왕씨의 고려 왕조에게 망한 것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발해가 망한 후, 소위 발해의 유민들이 상당수 고려로 귀화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당시 발해내의 우리 민족들은 거란의 야율씨 왕실의 지배를 받느니 고려로 귀화하고 싶어했을까?  소위 그 귀화 유민들이란 단지, 다 쓰러져 가던 대씨 왕실을 끝까지 지지하던 극히 일부가 아닐까?  대부분의 우리 민족들은, 비록 야율 아보기가 거란족이라고는 하나, 거란족 또한 고구려, 발해의 성원이었으니, 고구려의 후예 중 야율 아보기와 같은 걸출한 영웅이 나왔다면, 이제는 그 기운이 다 한듯한 대씨 왕조보다는, 강성한 기운으로 새로 떠오르는 야율씨 왕조에게 더 기대를 걸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면, 요나라가 완전히 거란족에 의해서만 다스려졌는지, 아니면 우리 민족과 말갈족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이 요나라의 실체는 제가 굉장히 궁금히 여기는 부분인데, 조만간, 고려, 발해, 요나라의 삼국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과 가설을 제시하는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한편, 고구려의 부흥 운동이 성공한 것과는 달리, 백제의 부흥 운동은 앞서 언급했듯이 백강 전투의 참패를 계기로 완전 실패한다.  그러나 그것이 백제가 신라에 흡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왜국은 백제의 제후국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백제의 유민들은 백제의 부흥 운동 실패 이후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물론, 힘없는 일반 백성과, 또 귀족이라 하더라도 손 쓸 시간이 없이 나당 연합군의 포로가 된 자들은 별 방법이 없었겠지만, 부흥 운동에 참여했고 그 부흥 운동의 실패를 감지하고 손을 쓸 시간이 있었던 귀족들이나 병사들은 어찌 하였을까?  한반도에 남아서 신라의 지배하에 살기를 택했을까, 아니면 백제의 제후국인 왜국으로 빠져 나가기를 시도했을까?  만약, 왜국이 정말로 백제의 제후국이었다면(여러 정황이 그런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물으나 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연방제를 통해 백제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던 왜국에 백제의 귀족 출신 유민들이 대량 유입되었다면, 결국 백제라는 나라는 한반도 안에서는 밀려 났지만, 그 명맥은 제후국인 왜국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편,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처음에는 각각 발해와 왜국이 언젠가는 신라를 공격하여 자신들이 신라의 지배를 벗어나 다시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생각을 개조시키기 위하여, 신라 정부는 김 유신과 김 춘추가 죽은 뒤에 “삼한 일통”이라는 이론을 생각해 내고, 그것이 마치 처음부터 김 유신과 김 춘추가 추구하던 바였던 양 선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라 정부가 약해지자,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세워진 것은, 그러한 신라 정부의 노력이 완전 실패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발해와 왜국이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기대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그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도중 신라 왕실의 힘도 약해지자, 발해와 왜국의 도움 없이 자신들 스스로가 고구려와 백제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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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서 자문자답식의 문체를 끝내고, 평소의 제 문체로 돌아가겠습니다.  지금부터의  내용을 고려할 때 문체를 바꾸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아서입니다.]

위에 쓴 내용들의 결론을 내리면,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삼국 통일이란 부르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며,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삼국의 재편성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에서는 고씨 왕조가 멸망하고 대씨 왕조가 세워졌으며, 백제는 한반도의 본국이 망함에 따라, 그 제후국인 왜국을 주축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삼국 통일이 아니고 삼국의 재편성이라 하여 그 역사적 중요성이 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삼국의 재편성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논의하기를 꺼렸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지금의 우리가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던,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나당 공조 참여 결정이 바로 현재 우리 민족의 정체성 형성의 초석이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온다는 것입니다.”라고 썼는데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나당 공조 참여 결정에는 “삼한 일통”을 이루겠다는 개념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 많은 백제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이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북쪽에서는 고구려를 잇는 발해가 서고, 바다 건너에서는 백제의 제후국인 왜국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발해나 왜국과 손잡고 신라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기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에게 고구려, 신라, 백제는 한 핏줄이며, 발해와 왜국은 오랑캐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데 주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신라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나눠지고, 결국 후고구려의 후신인 고려에 의하여 후삼국은 통일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고려 역시 삼한 일통의 개념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신라가 삼한 일통을 주장했던 이유와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즉, 고려는 옛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웠지만 그들의 수가 너무 적었던 탓에, 후삼국 통일 후 도저히 신라계와 백제계를 푸대접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결국 통일된 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 핏줄이라고 주장해야 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려 제국이 처음 뜻대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거란족과 말갈족을 포함한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 때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신라계와 백제계를 말갈족이나 거란족보다도 더 푸대접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고려 제국의 그러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본래 한 핏줄이라는 이론은 이후 우리의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정립해 나가는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입니다.  고구려의 명맥을 잇겠다는 고려가 그런 중요한 역사 편찬 사업을 신라 왕족 출신인 김 부식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놈의 삼국사기가 고구려 역사 중심이 아닌 신라 역사 중심의 사서가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고려가 나라 이름은 고려라고 지었지만, 그 안에서의 고구려계의 세력은 신라계에게 밀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려 안에서 고구려계의 세력의 전혀 힘을 못 쓴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북방계 국가인 고조선을 민족 형성의 시발점으로 인정한 것은, 고구려계의 입김에 신라계가 승복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단군의 자손들이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에 의해 통일되어, 고려에 이르렀다는 역사관이 고려 시대에 확립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한 핏줄이라는 민족관이 형성되었다고 보며, 앞서 제가 “지금의 우리가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던, 김 유신과 김 춘추의 나당 공조 참여 결정이 바로 현재 우리 민족의 정체성 형성의 초석이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온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글을 끝내기 전에, 왜국과 만주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더 적겠습니다.

우선, 왜국.  왜국은 아시다시피 일본으로 개명하는데, 아직 왜국이었던 때인지 일본으로 개명한 이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백제의 계승자라는 개념을 스스로 포기한 듯 보입니다.  망한 백제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 심기일전하여 새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이 자신들이 고구려의 명맥을 계승하는 나라임을 강력히 주장한 것과는 너무나도 비교가 되는 태도입니다.  백제의 계승자임을 주장할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한 일본‥‥‥.  거기에 더하여,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귀족들은 대부분 왜국으로 건너갔을지 몰라도, 백성들의 대부분을 이루는 서민들은 계속 한반도에 남아 신라의 지배를 받다가 후에 후백제를 세우고, 그 이후 고려, 조선의 백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백제의 계승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민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조금 더 복잡한 이야기가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유입되지 않고 발해의 백성이 되었고, 또 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요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며, 요나라가 멸망한 후는 말갈족의 후예인 여진족 완옌 아구타가 세운 (완옌 아구타가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라는 설이 있는 것은 알지만, 제 생각으로는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무시합니다.) 금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대 놓고 요나라가 고구려의 명맥을 잇는 나라라고 주장한 거란족이나, 그 이후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모두 고구려의 후예들이므로, 비록 우리 민족이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요나라 금나라를 거치는 동안에도, 고구려계 우리 민족들은 고구려의 명맥을 계승하는 국가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제는 금나라가 망한 1234년 이후, 금나라에 살던 고구려계 우리 민족은 어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금나라 지배하에서 많이 여진화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 1234년 이후의 고구려계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중요한 일부분이며,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 획책에 맞서기 위해서는 꼭 연구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 편, 1234년 금나라가 망한 후, 1616년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울 때까지 거의 400년 동안 만주는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 몽고족의 원나라와 중국인의 명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니, 그것이 아무리 행정상만 그런 것이었다 하더라도, 만주 땅이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후예가 아닌 민족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는 가장 오랜 기간인 것입니다.  결국, 고구려의 후예인 만주족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지만, 그 당시 만주족이 얼마나 고구려의 명맥을 중요시 여기고 있었는지도 미지수이고, 또 명나라가 멸망한 후 중원을 정복하여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만주족은 완전히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 현재 인구는 1000만이 넘는다고 하지만, 만주어를 할 줄 아는 만주족은 100명이 안 된다는 통계가 있는 등 (참고; http://ko.wikipedia.org/wiki/%EB%A7%8C%EC%A3%BC%EC%96%B4 ; 그러나, 만주어의 방언으로 볼 수 있는 시버어는 중국 신장의 시버 자치현에 살고 있는 약 19만명 정도의 시버족 중, 3만명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고 함), 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입니다.  (참고로, 거란족은 그 훨씬 이전에, 아마 금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세워질 때 쯤,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음)  만약, 만주족이 욕심을 부려 중원을 정복하지 않고 만주에 독립국을 세우는데 만족했다면, 아직도 만주어를 국어로 쓰는 만주국(일제의 괴뢰 정부로 세워진 만주국과 구별하시기 바람)이 만주 땅에 존재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나라와 만주국은 서로 누가 고구려와 발해의 정통 후계자인가의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때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대제국을 세웠던 만주족은 이제는 자신이 고구려와 밭해의 후예라는 주장을 펼칠 경로조차 없는 약소민족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21세기에 고구려의 유일한 후계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민족뿐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 공정에 맞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일한 후계자로서의 우리 민족의 위치를 지키려면, 우리의 역사학자들이 더욱 부지런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즉, 고려에 유입되지 않고 요나라, 금나라에 잔류한 우리 민족의 발차취는 물론, 우리 민족과 같이 고구려와 발해를 이끌어 간 말갈족, 거란족의 발자취도 (특히,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 학자들에게 왜곡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부지런히 챙겨서 연구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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