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 - 고정희(高靜熙 1948~1991)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을 가질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 편지 10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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