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은행을 만드려는 시도는 계속 있어 왔습니다.  2010년 기독교은행 설립 해프닝이 있었고 사기로 목사가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지요.  


오늘날도 기독교의 금융권 진출 시도는 끊이지 않습니다.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선교은행' 이라는 것을 만드려는 시도가 있지요.

아래는 2010년 당시 크리스천뉴스의 논설입니다.  심지어 바이블에 의하면 무이자가 원칙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기독교은행 설립 시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교은행 설립 시도에도 똑같은 말이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요번에는 별 비판의 목소리가 보이지가 않네요.  망하는 교회들이 많아져서 그런가 생각이 듭니다.  상황따라 이랬다 저랬다..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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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자금으로 만들면 기독교 은행?
규모보다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
땅 밟기로 한참 시끄러운 와중에 기독교 관련 이슈가 또 터졌다. 이른바 기독교 은행 설립이 바로 그것. 지난 11월 1일에는 장충체육관에서 발기인 대회까지 가졌다고 하니 소위 '장난'은 아닌 듯싶다. 

한국사회복지은행 설립준비위원회(설립준비위원회) 강보영 위원장(새소망교회)에 따르면, 기존 은행을 인수하거나 새 은행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자본금 1조 5,000억 원 규모의 제1금융권 기독교 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기독교사회복지은행(가칭) 인가 신청서를 내년 상반기 중 금융위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설립준비위원회는 또한 기독교 사회복지은행을 통해 기독교계 기업과 신자들의 투자 및 예금을 받아 교회 건축·운영 자금을 저리로 대출하고 미소금융과 비슷한 서민 대출도 취급하겠다고 밝혔다. 즉, 중소형 교회에 보다 저렴한 대출, 기독교계 기업과 신자들의 투자 및 예금 유치를 통한 저리 대출, 미소금융과 유사한 서민 대출 등의 취급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은 분명 제1금융권 은행 설립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직 그 정체성이 명명백백히 드러나지는 않아 정확한 진단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자본금 1조 5,000억 원 규모의 제1금융권 기독교 은행 설립"이라는 언급과 '교회 건축, 운영 자금 저리 대출이나 서민 대출' 등의 업무 내용이 왠지 동그란 네모처럼 부조화로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인가.

왜냐하면 굳이 거대 제1금융권 기관을 설립하지 않더라도 중소 교회의 자립을 돕거나 가난한 서민을 돕되 적은 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할 수 있는 보다 효율적인 방법은 충분히 많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방향성에 제1금융권 은행 설립은 오히려 여러 가지로 방해가 될 수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혹시 기독교라는 이름만 붙인 거대 금융 기관을 꿈꾸는 것은 아닌지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게다가 발기인 대회 당일 엄신형 한기총 명예 회장(위원회 명예 대표회장)이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만드시고자 작정하고 G20 정상회의 의장국을 맡게 하셨고, 이제 금융계를 통해 여러분께 하나하나 넘겨 주시는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한 '말씀 선포' 중의 한 대목은 이 같은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든다. 

따라서 이분들이 이 같은 혐의를 벗고 진정한 '기독교', 혹은 '기독교적' 은행을 설립하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에 앞서 개신교(Protestant)의 종교 개혁 정신에 부합하도록 성경으로 돌아가 그 원칙을 먼저 살펴야 마땅하다 하겠다. 

대출에 대한 성경의 원칙; 요구대로 넉넉히 꾸어 주라 

금융에 관한 성경의 원리는 주로 대부, 즉 대출에 관한 것인데 이는 그 관심이 주로 가난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출과 관련하여 성경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고 명령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 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7~10) 

심지어 안식년이 되면 그 빚이 탕감되기 때문에(신 15:1~11) 이로 인해 아까운 마음을 품는 것을 '악념'으로 규정하고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 37:21)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갚을 수 있는 돈을 갚지 않는 대출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철저하게 지양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가난한 사람이 중심이 되기는커녕 가난이 원죄가 되어 마땅한 대출 기관조차 찾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명백히 대조된다. 

또한 성경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출 22:25) 

"변을 위하여 꾸이거나 이식을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정녕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중략)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이나 이식을 취하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고." (겔 18:13,17)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하거나 나아가 이를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는 것을 가난한 자에 대한 강력한 압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 대목 또한 리스크프리미엄(Risk premium)이라는 명목으로 가난할수록 고리가 책정되고 심지어 대출이 가능한 금융 기관까지 철저히 차등화하는 현대 사회와는 강력하게 대조됨을 알 수 있다. 

담보에 대한 가르침은 어떠한가?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신 24:10~13)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신 24:6) 

위의 신명기 말씀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전당물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도 성경은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서 담보, 즉 전당물을 취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기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우선 금융과 관련하여 성경은 주로 대부법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는 그 관심이 주로 가난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부 원칙으로 들어가도 자연스럽게 꾸어 주는 이보다는 꾸는 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 즉, 꾸어 줄 때 꾸는 자의 요구대로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이자는 무이자가 원칙이다. 담보는 가난한 사람의 생존권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잡지 않거나 '매우 신속히' 돌려주는 것이 기본 정신이라고 하겠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 모든 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과 명백히 통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추상성의 한계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 아닌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과 진정한 '섬김'의 방법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의 원리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금융 시스템과는 반대편 끝에 서 있음 또한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같은 원칙을 단순 방법론으로 접근해서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흔히들 핑계 삼는 이른바 복잡한 현대 사회에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 유사한 사례가 이미 많이 있다. 따라서 좀더 솔직히 보면,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기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시리라. 

진정한 기독교 은행은 규모가 아닌 원칙의 문제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른바 기독교 은행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이 제시되지 않아 단정적인 평가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나온 논의들을 종합해 보면 설립준비위원회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독교 은행의 골격과 방향성이 성경의 원칙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지 매우 염려스럽다. 진정 성경의 원리를 따르고자 한다면 굳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시중 은행과 동일한 방식의 제1금융권 은행을 설립할 필요 없이 개(個)교회에서 일종의 신용 조합을 세워 교회 안팎이나 지역 사회의 가난한 분들을 돕거나 아니면 규모가 문제가 될 경우 대단위 지역 연합 등을 통해 동일하게 중소 교회나 가난한 이웃, 혹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이 그 의중에 대한 괜한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혹시 한국의 많은 대형 교회들 속에 은연중에 녹아 있는 '큰 것이 아름답다'는 사고 속에 무비판적으로 대형 금융 기관을 세울수록 하나님의 복이라는 식의 전제를 깔고 일(?)을 추진하고 계시다면 야훼께서 열방 중에 복을 주셔서 베푸신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이 가장 강성했을 때가 우리나라 일개 지방도 크기를 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백성이 하나님의 뜻과 법도를 따라 행함에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대형화 지향 속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꾸이는 자보다 꾸는 자를 우선시하는 성경의 원리와는 달리 아무런 인간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물신 숭배에 가까울 뿐이다. 

따라서 설립준비위원회가 세우려고 하는 이른바 기독교 은행이 기독교 단체나 개인에게서 자금을 모아 '세상의 금융 기관'과 동일한 사업 분야를 영위하면서 저리 대출 등을 일부 곁들이는 정도라면 당장 그 논의를 접고 정말 '성경으로 돌아가서' 아예 새 판을 짤 것을 감히 권유드리고자 한다. 그전에는 이분들이 표방하는 기독교 은행보다 몇 해 전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의 노벨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그라민은행이 훨씬 더 기독교적이고 심지어는 성경적으로 보이는 아이러니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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